한주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전 주에 세비야 축제라고 한 이틀 낮밤을 바꿔 놀았더니 시차적응을 하는 건가.. 골딱 밤을 샌날이 이틀이나 되다보니 생활리듬이 깨지고, 날씨는 우중충..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통해 뭔가 상당히 정리안된, 장마철 눅눅한 공기같은 일주일이 지났다.
주말엔 리듬을 찾아야돼. 금요일 뜨끈하게 목욕을 하고 따닷한 전기장판에 폭 들어가서 잠을 잔 덕에 오늘은 머리가 한결 상쾌한 기분. 자다 깨다, 먹고 또 자고, 비몽사몽 하루를 보내다 저녁늦게서야 책 한권을 챙겨들고 동네 카페로 갔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3월 잠시 이곳에 머물고간 동생이 두고간 책이다. 이 책보고 리스본을 기차타고 가려고 했다나.. 세비야에선 리스본행 야간 열차가 없다. 야간 버스는 있어도..
지극히 모범적이고 짜놓은 틀안에 엄격한 모범답안 같은 한 교수가 한 여인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불연듯 떠나는 여행이야기.
아직 1권의 중반을 읽고 있지만 재미있는 책이다. 낯선 곳으로 들어가는 계기는 사실상 무엇에 의한 것인듯 하지만 이미 본인의 필요로 내부에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외적 동기가 있어도 본인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인간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길을 나선 이남자. 일상과 낯선 시간안의 이질감을 오가며 점차 낯선 시간을 자신의 리듬으로 살기 시작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세비야 축제 한주간동안 뭘했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이 일주일을 통째로 놀아본지가 오랜듯. 평상시에는 학교를 가야하고, 좀 긴 방학이면 근처에 여행을 다녀오고 해서 세비야에서 일주일을 통으로 논지는 참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세비야도 나에게는 겨우 1년 반 좀 넘은 신선한 공간이거늘 언제부턴가 너무 등한시 했단 생각이..그래서 였을까 한주간 이곳의 지인들과 함께하는 시간동안 내가 사는 공간과 사람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출라 언니와 카디스의 화가친구
학교 출라언니는 요즘 슬럼프. 며칠째 얼굴이 어두웠다. 축제주간 시작되기전 주말 잠시 언니네 동네서 맥주한잔하고 강변 커피숍에서 커피한잔하며 수다떨다가 축제기간중 하루 카디스로 바람을 쐬러가기로 했다. 왜 요즘 그렇게 슬럼프인가 했더니 학교 사람들때문에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단다. 나는 외국인에 이 나이에도 학교에서는 아주 어린 20대초반 아그들을 제외하면 거의 막내급이라 별로 사람들과 부딪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다. 대충 못들은적, 실제로도 못 알아듣기도하고..ㅎ 하지만 같은 이곳 사람들끼리는 아닌가 보다. 워낙 한 예술 하는 사람들에, 나이들도 어느정도 있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그룹자체가 굉장이 특이하긴 하다. 가끔 보고 있으면 시트콤 캐릭터들은 다 모인듯. 수업시간에 한번 말을 시작하면 틈도 없이 쏟아지는 말에 종종 노트에 "아이고 시끄러워라"라고 쓰곤 한다. 이 요란스러움, 복잡스러움이 세비야 사람인 언니도 적응이 안되나보다. 게다가 언니는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우등생 스타일. 실제로도 우등생이다. 나처럼 통과만 하면 장땡인 아이와는 다르니 최근 작업들이 좀 어려워지면서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았다.
카디스에서 출라언니의 옛 미술선생님이라는 아가씨를 만났다. 나이가 내 또래 정도 되는 친구였는데 언니 말처럼 상당히 씩씩하고 자유분방한 친구였다. 하지만 사는 일이 녹녹치 않은 듯. 올해 겨우 자리가 난 임시 초등학교 미술 강사를 하면서 작은 화방을 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그렇게 많진 않단다. 화방이 위치한 곳은 카디스에서도 다소 외진, 동네가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니란다. 잠시 화방 구경을 시켜준다고 하여 따라갔는데 주변에 이미 거하게 하신 아저씨들이 서성거리고 있어 긴장이 되더라는.. 화가친구는 작업실을 거의 철문에 두개의 쇠열쇠를 걸어 잠그고 다니는데 확인에 확인을 할 만큼 지역이 불안정해 보였다. 미술강사와 화방의 미술교시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남는 시간에는 수학 개인과외를 하고 있단다. 화가가 수학과외라..이런모습은 우리나라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람사는 거 어디나 똑같은 거구나..그렇게 일주일 내내 왔다갔다하며 벌어야 겨우 한달 집세랑 생활비가 나온다니 허허실실 강한듯해도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싶었다.
문득 이곳에서 잘 놀고 먹고 있어요..라고 소개하기가 참 미안해졌다. 사실 요즘 스페인 경제위기가 표면화되고 실제로 주변에 실업자들도 많아 지고,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예전에는 너 여기서 뭐하니? 하면 "암 것도 안하고 놀아"라고 잘도 말했는데 요즘은 꼭 "공부한다"라고 한다는... 새삼 내게 주어진 이시간이 얼마나 큰 복인지 느끼게 된다.
출라와 로하
비판과 불평사이. 다국적 저녁식사에서
모로코 여행중에 만난 세비야의 친구 인마가 저녁을 먹자고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이탈리아 친구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같이 가자고.. 여기 아이들 식사 초대는 항상 가보면 새로운 사람이 대부분. 인마와 저녁초대를 한 친구, 그 친구 집의 동거녀인 미국친구, 이탈리아 친구, 인마의 무용친구까지 해서 결론적으로 세비야사람 2명, 이탈리아 사람 2명, 영국인 1명, 미국인 1명, 한국인 1명 인 국제저녁식사가 되었다. 어쩌다 주제가 그렇게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페인, 세비야문화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지독히 남성중심적인 스페인어의 성향, 세비야 남자들의 무매너를 실랄하게 비판하다가(영국 남친을 둔 세비야 나이 지긋녀가 가장 열을 올리더라는..)결국 세비야에는 쓸만한 남자가 한명도 없다는 어이없는 결론에 도달하더니 이어서 경제위기와 더불어 스페인 특히 남쪽지방의 비효율적 근무시간에 대한 비판까지 이어지며 거의 불평으로 일관되는 이야기에 좀 피곤했다. 예전같으면 아마 신기해하며 들었을텐데 사실 워낙 이곳에서 투덜투덜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뭐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굳이 저녁먹으로 열올리는 모습이 좀 우습기도했다. 사실 대부분이 진지한 비판보다는 불평이고 투덜거림이라 더 지루했는지도... 열심히 이 열올림에 동참한 미국친구는 사실 이해가 되었다. 워낙 미국문화와 이곳 문화가 다르니 그렇기도하고 미국인이 스페인어 발음하는 거 가지고 많이 재미거리로 삼기도하기때문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그래서 이 친구는 다음 달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니..정말 싫구나..라는 게 명확하지 않은가. 근데 이미 7-8년을 이곳에 자리잡고 살면며 잔뜩 불평만 늘어놓는 이탈리아 친구들이나 어느 누구보다도 세비야캐릭터를 가진 나이 지긋녀의 의견에는 그다지 공감이 안되더라는.. 내가 보기엔 누구보다 세비야스러운 캐릭터 들이었는데 말이다..ㅎ
친구 인마와 집으로 돌아오며
"넌 세비야 남자친구가 있는데 다들 세비야 남자는 못났다고 하니 어쩌냐?" 했더니 웃는다.
"참 재밌어. 난 처음엔 스페인 사람들이 하도 '스페인 최고 최고'해서 거참 자기애들이 강하기도하지..했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스페인 참 독특한 나라긴 하네 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근데 그러기 시작하니까 주변에 이제 불평하는 목소리들이 많이 들리기 시작해. 사람들이 바뀌는 건가? 이제서야 내가 실제를 보는건가?"
"둘다일 거야. 네가 만나는 사람들이 좀더 다양해 진것도 있을거고 요즘 사는게 힘들어지니 사람들이 더 투덜대기도 하고...근데 그렇게 투덜대도 다들 자기것을 좋아해. 그 언니(물론 인마는 언니라고는 안했고 이름을 말했으나 이름기억안남..세비야 지긋녀)도 그렇게 세비야에 대해 투덜대도 매일매일 세비야 축제가는 누구보다도 세비야사람이라 할 수 있거든"
"내가 봐도 그 언니는 딱 세비야 사람이더라..흐흣"
허긴 생각해보면 나도 한국있을때 왜 한국인은? 하며 투덜거렸던 것 같다. 근데 여기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말할때 한국의 좋은 점을 말하게 된다. 요즘 한국 도자기 역사 발표준비를 하며 새삼 한국인의 자긍심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 자기것을 결국은 사랑하게 되어있는것. 어쩔수 없는 본능인가?
세비야 축제 2년차
작년에 세비야 축제때는 하루 반나절 정도 있다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뭐야..이거 집안 잔치잖아..하며 알메리야로 여행을 갔었었다. 세비야 축제는 그렇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축제 장소에 까세따 라고 천막으로 집을 짓고 그 곳에 지인들을 초청하여 먹고, 마시고, 춤추며 일주일을 보낸다. 커다란 세트장을 지어놓은 것과 같이 그곳에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플라맹고 복장을 하고 말을 타고, 다닌다. 마치 영화속 주인공인냥.. 개인 까세따들은 그곳에 들어가는데만도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지인을 초청할 경우 대부분 음료나 음식을 공짜로 제공하기때문에 그야말로 돈쓰는 집안잔치라고 해야겠다. 그러다보니 외국인들은 잠시 구경가는 거 외에 아무리 까세따에 초대받아도 다 아는 사람들 틈에서 좀 벌쭘하다는..
올해는 어디 여행갈 계획이 없었던 고로 딱 하루정도 친구와 가서 분위기만 살짝 즐기고 와야지했는데 첫날 전등식 외에도 이틀 꼬빡 가서 신나게 놀다왔다. 무슨 변화가 있었나?
축제 시작 자정에 있는 점등식은 올해는 볼생각이 없었는데 학교 수업후 축제장 옆에 사는 수산나가 자기집에서 저녁먹고 같이 보러 가자고하여 얼결에 보게 되었다. 수산나는 꼭 특별한 날엔 기념으로 하몽을 먹는다나...그날도 하몽 한팩을 사뒀더라는.. 점등식 15분전에 하몽과 맥주를 마시고 점등장으로 가서 와!!! 축제다..한번 해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무지 심플하고 담백한 세레모니였다.
그리고 다시 수산나와 하루 날을 정해 축제장에서 만났다. 수산나의 학교 선생님들과 공공까세따에서 만났는데 작년에 잠시 들렀던 공공까세따보다는 훨씬 작고 무슨 NGO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분위기도 아주 좋았다. 수산나에게 작년에는 엄두도 안내던 세비야나도 배워보고, 막상 배워보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서 대충 첫스텝정도는 감이 왔다. 구경꾼이 아니라 그냥 오랜만에 수다떨고 춤추고, 놀자 하고 노니 나름 재밌다는 생각이.. 축제장에 늦게 도착한 폴아저씨를 2차로 만나 아저씨 가족 까세따와 친구 까세따를 돌며 놀다보니 시간이 새벽 2시가 넘었다. 까세따들을 돌다보니 축제장에서 세비야나만 부르고, 춤추는게 아니더라는..각 까세따에 밴드들이 라이브를 하는데 우리나라 잔치하면 꼭 나오는 레파토리가 있듯이 여기도 국민 레파토리가 있어서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다 따라노래하고 춤추고.. 몇변 들으니 대충 따라할 수 있으니 나중에는 점점 재밌어 졌다. " 어 이거 재밌네.." 결국 동네사는 친구와 하루 더 가서 오랜만에 신나게 새벽까지 놀았다. 나중에는 거의 대부분의 스페인 국민 레파토리는 따라할 수 있게되었으니 내년에는 꼭 세비아나를 배워 제대로 놀아주리라 다짐..작년과 뭐가 바꼈나? 노는 자세가 바꼈다고 해야하나. 남들 어찌노나? 구경할때는 재미없더니 그냥 내가 노는 대로 놀자..하니 재밌더라는.. 뭔말인고 하니 사람 노는거 다 똑같더라 이거지.
스페인 경제 위기위기하지만 세비야 축제장에는 경제 위기따윈 없었다.. 이게 노는걸 워낙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성향탓인지..결국 세비야 축제가 있는 사람들의 축제라..그런지는 정확하게 뭐라 결론을 내리기가 힘들다.
레베카와 마리아.
수산나와 또 다른 마리아 ㅎ
처음 세비야에 도착했을때 처럼, 마냥 이쁘고, 아름답던 세비야는 아니다. 세비야사람보다 세비야를 더 많이 안다고 이곳 친구들이 말하긴 하지만 정보는 많을지 몰라고 정말 세비야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전히 새롭게 발견되는 세비야의 속살에 흠칫 놀라곤 하고, 가끔 이 도시와 사람들이 너무 낯설어 당황하기도 하니 말이다.
모든 관계는 진심을 쏟는 시간과 정성으로 만들어 진다고 했는데 그렇게 끈끈하게 만들어져가는 관계들의 시작이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기쁠것 같다. 여전히 과정이지만, 결국 떠날사람처럼이 아닌 그래서, 이 시간이 한순간의 공기처럼 공간을 떠나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닌, 나의 그 어느 시간과 또 연결될 그런 살아있는 시간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지난 주중에 우체통에 있던 동생이 보내준 깜짝 책 2권과 장문의 편지, 못 가는 줄 알지만 이 먼거리까지 국제우편으로 진심으로 초대하는 맘을 담아 보내준 후배의 청첩장(스페인에 있을때 내가 꼭 가야하는 결혼식이 줄줄이. 정말 아쉽다), 오늘 아침 배달된 인생 선배님의 푸짐한 김 한상자.
결국 우리가 실면서 원하는 것, 지켜야하는 것, 만들어가야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그건 어디에 살건 마찬가지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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